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걸 꺼려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친구일지라도. 내가 사적으로 지내는, 남을 초대하기엔 어쩐지 '준비되지 않은 것 같은' 공간을 누군가에게 100% 오픈한다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저항감과 거부감이 있었다. 인간관계에 있어 어느정도 거리감이 유지되던 선이 무너지려 할 때 본능적으로 회피적인 행동을 하곤 하는 나의 성향이 그렇게 나타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집에서 나와 함께 티타임을 즐긴 친구는 16년 이상 함께 알고 지낸 친구인데, 내가 자신을 집에 초대하지 않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곤 했다. 정작 나는 그 친구의 본가를 예전에 한 번 방문하기도 했었기에 친구가 서운해하는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마음 한 켠이 몹시 불편했었다.
그랬던 내가 친구를 초대하게 된 것은 '미니멀라이프'와 '티타임'에 대한 내 흥미와 로망때문이다. 미니멀라이프를 처음 접했던 작년 이래 지금까지 집에서 공간만 차지하던 불필요한 물건들을 거의 다 비워놓고 나니 집에서 드디어 여백의 미학이 느껴지며 누구를 초대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홍차와 커피, 베이킹에 관심을 지니게 되면서 자연스레 직접 마련한 티타임을 지인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간 아무도 집에 초대하지 않는 나이기에 내가 준비한 티타임은 항상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었고, 혹은 일상을 공유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특별한 날에만 이루어졌다. (슬프게도, 가족들은 카페인에 찌들대로 찌든 나와는 달라 차와 커피를 그닥 즐기지 않는다.)
집에 있던 양파, 치즈, 토마토소스, 카레가루, 계란, 버섯을 활용해 올 1월 초 유튜브를 통해 배운 '에그인헬'을 메인 점심요리로 준비했다. 에그인헬에 곁들일 식빵과 함께 도착한 친구가 요리를 하는 나를 기다리게 되어, 나는 영국여행 때 사왔던 다양한 티타올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인 알폰스 무하의 화보집을 보라고 내주었다. 주방에서 잘 보이는 냉장고 옆 쪽 벽면에는 블렌하임 궁전에서 샀던 티타올을 함께 보며, 시즌이 바뀔 때마다 냉장고에 티타올을 바꿔서 붙여놓는 내 습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매우 예리해서, 내가 영국에서 가져온 티타올들이 관광지에서 구매한 것 같아 왠지 찻자리에 셋팅하기 어려워보인다는 코멘트를 했고, 나는 셜록홈즈박물관에서 사온 티타올은 너무 어울리지 않아 단 한번도 셋팅을 안했다며 친구의 말에 수긍했다. 친구 말대로 영국에서 사온 티타올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너무 강해 찻자리에 조화가 잘 되지 않아 제대로 찻자리 셋팅에 써본 적이 없다.
티타임을 위해 구매해놓고 한번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2단 디저트 트레이 위에는 내가 직접 만든 LA찹쌀떡과 마들렌, 내가 찬장 속 라탄바구니 안에 숨겨놓고 야금야금 꺼내먹는 과자들, 집 근처에서 유명한 베이커리가 할인행사를 할 때 사다놓고 정작 냉동실 안에 얼려만 두었던 마카롱을 올렸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차브랜드인 포트넘앤메이슨의 로얄블렌드를 첫 홍차로 내어갔다. 로얄블렌드를 다 마신 후에는 로즈포총과 카운테스 그레이를 계속해서 내어갔다. 나랑 친구 둘 다 홍차만 1리터 가까이 마신 것 같은데, 둘 다 요동치는 방광에 힘들어했다.
친구에게 내가 사는 공간을 보여주고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 그것은, 살아온 세월과 함께 빚어진 '나'라는 사람을 꽤 깊고 세밀하게 보여주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공간 속 나에게 의미있는 것들을 함께 보며 자연스레 이어진 대화들은 내 안에서 묘한 울림을 일으켰다. 과거에 친구와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멋진 카페에서 시그니처 음료를 마시며 즐겼던 무수히 많은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물론 친구와 지금까지 함께 했던 그 모든 순간이 좋았지만, 오늘처럼 친구에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나 역시 내 안의 근거없는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심 집이 낡거나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을 보며 친구가 안좋게 보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친구는 그런 것에 대해 정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친구는 오직 나와 함께 나누는 대화에만 집중했다. 예전의 나는 왜 친구를 초대하는 것을 두려워했던걸까? 왜 선을 그으려했던걸까. 무엇을 두려워했던걸까.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대체로 새로운 시도가 좋은 경험을 만들어냈고, 좋은 경험은 새로운 시도를 불러왔다. 홍차, 요리, 미니멀라이프, 홈카페, 베이킹, 친구를 초대하는 것까지. 모든 새로운 시도가 쌓여 지금까지 나는 변화해왔다. 반면 오랜기간 현상을 유지하며 정체되어 있는 것은 그 순간에는 안온하게 느껴졌어도 결국엔 나를 서서히 수렁에 빠뜨리곤 했다. 그동안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처럼, 내가 습관적으로 '안 돼', '못할거야', '그럴 수는 없어'라고 되뇌이며 나의 변화와 성장을 저어하고 있지는 않은 지 되돌아 볼 수 있는 하루였다.
(예전에 올린 LA찹쌀떡 도전기를 공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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