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tv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청하는 편은 아닙니다. 정신 차려보니 꾸준히 보는 건 뉴스뿐이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tvn에서 제작한 예능은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알쓸신잡이나 강식당, tvn shift 같은 예능들을 열심히 구매하며 밤새도록 봤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얼마 전 tvn에서 '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 방영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명한(하지만 시간 들여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책에 대해 역사, 과학자, 작곡가, 작가와 같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 나와 책의 내용을 해석하며 나름의 견해를 밝히는 포맷이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이번 3월 10일에는 코로나 확산이 사회적 문제인 상황에 맞추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라는 작품에 대해 방영했더라고요. 방금 전 이번 편을 구매해서 쭉 보았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라는 작품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게 되고, 또 이 작품 속 상황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흥미롭게 경청할 수 있어서 보는 내내 몹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이번 편을 다 본 후 제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 출연진의 성별이 한 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첫 번째로 불편한 지점은 출연진의 성별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포스터 속에 나와있는 것처럼 남성 출연진이 네 명인 반면, 여성 출연진은 윤소희 씨 한 명뿐입니다. 게다가 이번 페스트 편은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박한선 박사(의학)와 김상욱 박사(과학)가 초대되었는데, 이 분들 또한 남성입니다. 즉 이번 편에는 남성 출연진이 여섯 명, 여성 출연진은 단 한 명이었던 셈이죠.
여기서 더 기묘해지는 부분은 바로 출연진의 나이입니다. 올해 기준 이적 씨는 46세, 전현무 씨는 43세, 설민석 씨는 50세, 장강명 씨는 45세입니다. 박한선 박사와 김상욱 박사 또한 45세는 훌쩍 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반면 유일한 여성 출연자인 윤소희 씨는 올해 28세입니다. 즉 이 프로그램은 평균 연령 46세인 네 명 이상의 남성 출연진과 올해 28세인 여성 출연진 단 한 명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이지요.
나이가 전문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기르고,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특정 사안에 대해 분석, 비평할 기회가 더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학에서 20대 교수를 찾아보기는 어렵잖아요?
이번 편에서 '연륜 있는' 남성 출연진들이 페스트라는 작품에 대해 자신의 전문 분야를 토대로 표현한 견해들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윤소희 씨의 경우, 자신만의 전문적인 견해를 밝히기보단 객관적인 지식을 요약하여 전달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보면서 놀란 부분인데, 남성출연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힐 때마다 카메라가 윤소희 씨를 집중적으로 클로즈업하며 윤소희 씨의 표정과 반응을 보여주는 장면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가 담당하는 역할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었습니다.
남성 출연진과 여성 출연진의 성비를 비슷하게 맞추거나, 아니면 여성 출연진 또한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온 연륜있는 사람을 캐스팅하는 것이 제작진에게는 많이 어려웠던 것일까요?
■ 내가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제가 두 번째로 느낀 불편함은 저 스스로 정보를 접할 때 지녀야 할 책임의식에 대한 것으로서, '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혹시 tvn Shift라는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나요? 이 프로그램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해 살펴보는 프로그램인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봤었답니다. tvn Shift 1,2편에서는 디지털 매체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이 상황 속에서 과연 종이책이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찰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어요. 그중 요새 독서 플랫폼이 변화하는 모습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몹시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건 이미 옛날부터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아예 책의 내용을 설명-요약해주는 플랫폼이 뜨고 있다고 해요. 책에 대해 소개해주는 북튜버, 다음 1 boon의 책식주의, 그리고 오늘 본 '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가 호응을 얻는 것 또한 이러한 사회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요새 블로그에 직접 글을 쓰면서, 어떤 컨텐츠를 전달할 때 '내용' 못지않게 '편집'과 '재구성' 또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정보들 가운데 어떤 내용을 강조하고 어떤 내용을 삭제할지, 또 그 정보를 어떤 관점으로 해석할지는 철저히 컨텐츠 제작자의 주관에 달려있더라고요.
그렇기에 제가 오늘 '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를 통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라는 작품에 대해 소개받았다고 해서, 제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프로그램을 통해 접한 건 '페스트'라는 작품의 요약과 그에 대한 제작진과 출연진의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저는 '페스트'라는 작품을 직접 읽어보지도 않았고, '페스트'라는 작품에 대해 직접 사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이 프로그램을 봤다 해서 '페스트'를 잘 안다고 떠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겠죠.
그동안 제가 직접 경험하고 사유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오진 않았는 지 불편해졌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통해 어떠한 정보에 대해 소개받았고 이것이 나에게 중요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이에 대해 직접 연구하고 사유하는 시간을 꼭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중요하지 않아 직접 사유할 가치가 없는 정보라면? 남들한테 제가 그 정보에 대해 잘 아는 것마냥 떠들어선 안될 것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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